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추리의 끝에서 마주한 인간의 본성

by ssnarae25 2025. 4. 1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_해문출판사
아가사크리스티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책 표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단순히 ‘누가 범인일까’를 맞히는 추리 게임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장을 넘긴 뒤, 그것이 얼마나 얕은 기대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단순한 범죄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어둠과 죄의식, 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되묻는 깊이 있는 서사였다. 이 책은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이름을 영원히 문학사에 새긴 작품이자, 독자를 작품 속 사건의 공범처럼 끌어들이는 강력한 심리적 미궁이다.

열 명의 인물, 외딴섬, 그리고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동요

이야기의 무대는 인간의 발길이 닿기 힘든 외딴섬 '솔저 아일랜드'. 초대장을 받은 열 명의 남녀가 저택에 도착한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고, 주최자 역시 불분명하다. 다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가 과거에 법의 심판을 피해 간, 도덕적으로는 죄를 지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도착 첫날밤, 저녁 식사 후 저택 거실에서 정체불명의 음성 녹음이 흘러나오며 이들의 과거가 폭로된다. 그 순간부터 섬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다. 사람들은 차례로 죽어가기 시작하며, 살인은 저택 안에 걸린 유아용 동요 ‘열 꼬마 인디언’의 가사에 따라 실행된다. 죽을 때마다 하나씩 사라지는 인형, 그리고 정확히 일치하는 죽음의 방식은 우연이 아닌 의도된 처형극임을 예고한다.

독자는 이 설정에서부터 몰입하게 된다.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립된 공간, 그 안의 제한된 인물, 그리고 예고된 죽음. 아가사 크리스티는 공포를 장르적으로 소비하기보다, 독자 스스로가 위협받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 안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불신, 두려움, 죄책감—은 이 작품의 진짜 주제이기도 하다.

추리는 시작된다 – 독자는 언제부터 공범이었는가

이 책은 추리소설이면서도 독자가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가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조용히 게임의 테이블에 앉힌다. "누가 다음에 죽을까?", "이 인물은 거짓말을 하고 있나?" 읽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인물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단서를 추적하며, 마치 포와로나 홈즈처럼 추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더 대단한 이유는, 독자가 매 순간 자신만의 진실을 만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각 인물의 증언과 알리바이는 완벽하지 않고, 모든 행동엔 의심이 따라붙는다. 심지어 독자가 신뢰했던 인물이 갑자기 죽거나, 모순된 증언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처럼 독자의 기대와 예측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혼란을 만들어낸다.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는 이 사람이 범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라며, 계속해서 자신만의 가설을 세우고 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이야기의 증인이 아니라, 사건을 구성하는 한 명의 심리적 공범이 된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는 진실을 마주한다. 살인을 저지른 인물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들 중 한 명이며, 모든 사건은 철저히 계획된 정의의 실행이었다. 범인은 그들 중 누구도 범죄를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완벽한 ‘심판극’을 연출한 것이다.

결국 그 누구도 살아남지 않았고, 진실 역시 바다 밑에 가라앉을 뻔했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에 익명의 고백문이라는 형태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건넨다. 독자는 비로소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 마치 실마리를 다 푼 탐정처럼 안도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묵직한 질문이 남는다. 이것은 정당한 복수인가, 계획된 살인인가?

이 질문은 독자가 책을 덮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범인이 드러났지만, 사건의 의미는 남는다. 독자는 추리를 마친 후에도 끝내 정답이 없는 질문과 마주한다. 그 점이 이 작품이 단순한 범죄 소설이 아닌 이유이며,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를 의심했는가

이 작품의 위대함은 결코 반전 하나에 있지 않다. 마지막 반전은 구조적 완성도를 마무리하는 장치일 뿐, 진짜 힘은 독자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피어나는 불신과 의심,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낸 가설들이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고 나서, 며칠 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죄’라는 개념을 되짚어 보았다. 과연 법의 손길이 닿지 못한 죄는 정말 죄가 아닌가? 우리는 누군가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그런 질문을 던지며, 읽는 이의 머리가 아닌 심장을 건드린다.

이 책은 다 읽고 나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제야 보이는 복선, 가려졌던 진실. 이것이야말로 완성도 높은 추리의 진짜 묘미다. 그리고 그 순간, 독자는 단지 독서자가 아니라 ‘함께 사건을 경험한 자’로 바뀐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가장 먼저 의심했는가?

정보 및 이미지 출처: Naver, Goodreads, 나무위키, 해문출판사